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.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,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.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오에 겐자부로 (문단 편집) == 상세 == 1958년 당시 '사육(飼育)'이라는 작품으로 [[http://ja.wikipedia.org/wiki/%E5%A4%A7%E6%B1%9F%E5%81%A5%E4%B8%89%E9%83%8E|23세 5개월의 나이로 아쿠타가와상 수상]]이라는 상당한 경력이 있다. 당시에는 최연소 수상자였다. 이후 1999년 히라노 게이치로가 같은 23세의 나이에 생일만 약간 빨라 최연소 수상자 기록을 경신했고, 2003년 하반기 아쿠타카와상을 당시 19세이던 [[와타야 리사]]가 수상하며 이 기록은 한번 더 깨지게 된다. [[가와바타 야스나리]]에 이어 일본인으로는 2번째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. 노벨상 수상 직후 [[아키히토]] 덴노가 문화훈장과 문화공로상을 수여하려고 했으나, '''본인이 거부하였다'''. 이유는 '''전후 민주주의자로서 민주주의 위에 군림하는 권위와 가치를 인정할 수 없다'''는 것.[* 재미있는 것은 오에 겐자부로의 노벨상 수상을 예언한 [[미시마 유키오]]는 극단적인 덴노주의자였다. 친군국주의 vs 반군국주의로 정치성향이 완벽하게 정반대. 상술된대로 미시마 유키오는 그걸 다 알면서도 정치성향과 무관하게 오에의 작품성을 최고라고 공식적으로 단언했으니, 문학인으로서의 평가 태도는 모범적이었다.] 후술된 정치성향을 보면 알겠지만 좌파성향이 강해 사회운동도 하고, 특히 원폭과 원전 전반에 대한 비판을 많이 남겼다. [[반전]] 운동에도 앞장선 인물이다. 대표적인 [[친한]]파 명사. 실제로 노령임에도 한국에 자주 방문했다. 현재는 절필을 선언하며 작품 활동은 하지 않는다. 대신 사회운동을 택했다고. 2023년 3월 3일 향년 88세의 나이에 노환으로 별세했음이 3월 13일 공고되었다. [[https://www.news1.kr/articles/?4980076|#]]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